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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Hot Issue, Services

엔지니어도 사람이다

수업 끝나고 방에 돌아왔더니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나 때문에 블로고스피어가 온통 시끄럽다. 아직 나는 '현업'에 있어본 경험은 없기에 구체적으로 엔지니어에 대한 대우가 어떤 면에서 좋고 어떤 면에서 나쁘고를 논하지는 못하겠지만, 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할 얘기가 좀 있다.

내가 공학을 공부하는 이유?

음악가가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을 공부하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로 공학 분야가 흥미롭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상당한 지원을 받는 과학고를 나와 대통령과학장학금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분명히 국가에 감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족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더 큰 인재로 자랄 수 있는 기반은 국가가 마련해주었지만, 그 기반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고 이런 것은 내가 노력한 것 때문이다. 나는 나의 노력을 다른 사람 혹은 국가의 공덕으로 돌리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본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요즘 국기에 대한 경례 수정에 대해 행자부에서 몇 가지 시안을 놓고 여론조사를 하는 모양이다. 어렸을 때는 그냥 멋모르고 외웠지만 조금만 되돌아 생각해보면 상당히 무서운 사상을 담고 있다. 애국이라는 건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는다는 점에서, 또한 항상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지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행자부에서 내놓은 시안 중에 '진실과 정의로써'라는 말로 대체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든다.

엔지니어 이직금지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 개인이 노력한 대가를 정당하게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데, 서울신문 사설위원의 주장은 그러한 보상보다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차라리 그럴 거면 앞으로 과학고와 KAIST 졸업할 모든 학생들에게 외국법인 취업을 금지시키든지 KAIST를 감옥으로 만들어라. -_-

과학고 때 많이 들었던 얘기가, '너희는 국가에서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하여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반드시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공감하는 얘기다. 하지만 국가에 보답하는 것과 나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국가가 잘 되어서(내가 국가에 핵심기술을 개발해주어서) 나도 잘 되면(내가 그 정당한 대가를 받으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 내가 잘 되어야(돈을 많이 벌어야) 국가에 보답(학교에 기부금을 낸다든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과학고 때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 일부는 단지 주는 입장에서 말하는 기준으로 판단해버렸던 것 같다. 과학재단의 R&E 사사연구와 같은 제도와 지원은 매우 훌륭한 것이고 앞으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과학고는 사실 교육청에서 다른 학교보다 좀더 돈을 많이 대주는 것과 선생님들의 열정이 남다르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도 아니다. (공립학교라는 제한 때문에 선생님들은 몇 배로 힘들게 일하시는데도 별다른 보상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KAIST에 와서는 국내 최고 이공계 대학이라는 곳이 이렇게 도서관이 열악할 수 있는지 놀랍다. (요즘은 그래도 서남표 총장님이 재원을 많이 확보하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추진력도 강해서 일부 불만은 있어도 전반적으로 만족하고는 있지만.)

뭔가 근본적인 면을 보지 못하는 사설인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전체주의 국가도 아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을 가지고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 나라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발상이 가능한지 의아할 뿐이다.

정말로 엔지니어가 소중하다고 생각된다면, 그 엔지니어가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라. 이미 한계를 알고 있는 길이라면 애초부터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엔지니어는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ps. 스마트플레이스에 있는 에피소드가 실제로 일어나는 얘기다. 우리학교에도 여러 대기업들의 지원으로 산학장학생 제도가 있는데, 대개의 경우 학위 기간 곱하기 얼마 동안 그 회사에서 반드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